프랑수아 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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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수아 뤼드는 1784년 프랑스 디종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조각가이다. 그는 디종 미술학교에서 그림과 조각을 배운 후 파리의 제국 미술학교에서 고전 조각을 공부했으며, 로마 대상을 수상하여 유학 기회를 얻었으나 재정난으로 연기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브뤼셀로 망명하여 활동하다가 파리로 돌아와 낭만주의 조각가로 명성을 얻었다. 뤼드는 개선문의 "1792년 자원병들의 출정" 프리즈를 제작하여 유명해졌으며, 나폴레옹을 기념하는 《불멸의 각성을 하는 나폴레옹》을 제작했다. 그의 작품은 파리 개선문, 루브르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디종에는 뤼드 미술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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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뤼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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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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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프랑수아 뤼드 |
출생 | 1784년 1월 4일, 디종, 프랑스 |
사망 | 1855년 11월 3일, 파리, 프랑스 |
국적 | 프랑스 |
직업 | 조각가, 드로잉 화가 |
경력 | |
수상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2. 생애
프랑수아 뤼드는 1784년 1월 4일 디종의 쁘띠-푸아소네리 거리(현재는 프랑수아 뤼드 거리)에서 대장장이이자 자물쇠장이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14] 아버지는 뤼드에게 철을 다루는 기술을 가르치며 가업을 잇게 하려 했으나, 뤼드는 1799년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디종 미술학교에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14] 디종 미술관에서 뤼드는 디종 박물관의 부관장인 루이 프레미에에게 그림과 조각을 배웠으며, 프레미에는 뤼드가 징집을 피하고 1808년 파리로 유학을 갈 수 있도록 도왔다.[14]
1808년, 뤼드는 파리의 제국 미술학교에서 피에르 카르텔리에 밑에서 고전 조각을 공부했다. 동료 학생들 중에는 다비드 당제르, 제임스 프라디에, 앙투안루이 바리 등 훗날 저명한 조각가가 된 이들이 있었다. 뤼드는 에듬 고를의 조수로 방돔 광장 기둥의 조각 프리즈 제작에 참여하며 실무 경험을 쌓았다. 1809년, 아카데미의 연례 경연 대회에서 「카르타고 폐허 위에서 명상하는 마리우스」로 2등을 차지했고, 1812년에는 「두려움과 결합된 주의」와 「벌을 잃은 아리스토텔레스」로 로마 대상을 수상하여 로마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유학할 기회를 얻었다.[14] 하지만 아카데미의 재정난으로 유학이 연기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의 몰락과 프랑스 왕정 복고 이후, 뤼드는 브뤼셀로 망명하여, 디종 시절 스승이었던 루이 프레미에의 가족을 돌보았다. 1821년에는 루이 프레미에의 딸이자 화가인 소피 프레미에와 결혼했다.[15]
2. 1. 초기 생애 (1784-1815)
프랑수아 뤼드는 1784년 1월 4일 디종의 쁘띠-푸아소네리 거리(현재는 프랑수아 뤼드 거리)에서 대장장이이자 자물쇠장이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14] 아버지는 뤼드에게 철을 다루는 기술을 가르치며 가업을 잇게 하려 했으나, 뤼드는 1799년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디종 미술학교에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14] 디종 미술학교에서 뤼드는 디종 박물관의 부관장인 루이 프레미에에게 그림과 조각을 배웠으며, 프레미에는 뤼드가 징집을 피하고 1808년 파리로 유학을 갈 수 있도록 도왔다.[14]1808년, 뤼드는 파리의 제국 미술학교에서 피에르 카르텔리에 밑에서 고전 조각을 공부했다. 동료 학생들 중에는 다비드 당제르, 제임스 프라디에, 앙투안-루이 바리 등 훗날 저명한 조각가가 된 이들이 있었다. 뤼드는 에드메 고를의 조수로 뱅돔 광장 기둥의 조각 프리즈 제작에 참여하며 실무 경험을 쌓았다. 1809년, 아카데미의 연례 경연 대회에서 「카르타고 폐허 위에서 명상하는 마리우스」로 2등을 차지했고, 1812년에는 「두려움과 결합된 주의」와 「벌을 잃은 아리스토텔레스」로 로마 대상을 수상하여 로마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유학할 기회를 얻었다.[14] 하지만 아카데미의 재정난으로 유학이 연기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의 몰락과 프랑스 왕정 복고 이후, 뤼드는 브뤼셀로 망명하여, 디종 시절 스승이었던 루이 프레미에의 가족을 돌보았다. 1821년에는 루이 프레미에의 딸이자 화가인 소피 프레미에와 결혼했다.[15]

2. 2. 브뤼셀 망명 시기 (1815-1826)
뤼드는 1815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실각하고 부르봉 왕정이 시작된 후, 나폴레옹 지지자였던 루이 프레미에(Louis Frémiet)의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브뤼셀로 망명했다.[15] 1817년부터 1826년까지 브뤼셀에 거주했는데, 그곳에서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를 포함한 많은 망명자들을 만났다. 뤼드의 아내이자 화가였던 소피 프레미에(Sophie Fremiet)는 다비드의 제자가 되었고, 이후 그의 그림을 모사했다.[5] 뤼드는 브뤼셀에서 다비드의 흉상을 제작했는데, 신고전주의 양식이었지만 신경 질환으로 인해 변형된 다비드의 입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브뤼셀에서 뤼드는 벨기에 왕실 건축가 샤를 팡데르 스트라텐(Charles Vander Straeten)으로부터 벨기에 왕세자의 사냥 별장인 테르뷔렌의 장식용 부조 조각을 디자인해달라는 첫 번째 주요 의뢰를 받았다. 이 작품은 명예의 전당 원형 홀을 둘러싼 프리즈였다. 뤼드의 프리즈는 고전적인 사냥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입구 현관에는 ''멜레아그로스의 사냥''을, 원형 홀에는 아킬레우스의 삶을 묘사하는 8개의 부조 연작을 제작했다. 뤼드는 그의 작품을 고전 조각의 모델을 바탕으로 했지만, 그들에게 특별한 자연주의와 역동성을 부여했다. 원작은 1879년 별장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원형 틀과 삽화에서 만든 석고 복제본이 남아 있다.[3] 1821년에는 루이 프레미에의 딸이자 화가인 소피 프레미에와 결혼했다.[15]
2. 3. 파리 귀환과 낭만주의 조각 (1827-1855)
프랑수아 뤼드는 브뤼셀에서 충분한 기회나 도전을 얻지 못하고, 1827년 파리로 돌아와 파리 살롱에 작품을 출품했다.[6] 비록 짧은 시간 동안만 전시되어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품 "아르고스를 죽인 후 샌들을 매는 수성"(현재 루브르 박물관 소장)은 신고전주의적 주제에 역동성과 사실성을 불어넣어 그의 스타일 변화를 보여주었다.[6]1828년 파리에 영구 정착한 뤼드는 프랑스 국가로부터 주문을 받아 개선문의 프리즈 작업을 다른 조각가들과 함께 진행했다.[6] 1833년에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융합된 "거북이와 노는 젊은 나폴리 어부"를 선보여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 작품으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조각 부문)을 수상했다.[6]
뤼드는 말년에 생뱅상 드 폴 교회(Saint-Vincent-de-Paul church, Paris)의 제단을 위한 청동청동 십자가상(1852년)을 제작했다.[6] 디종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of Dijon)의 의뢰로 "헤베와 주피터의 독수리"(1852년)를 제작했고, "승리하는 사랑"(1855-57년)과 "그리스도의 머리"(1852년) 등의 작품을 남겼다.[6] 사후 그의 제자이자 조카인 폴 카베(Paul Cabet)가 미완성 작품 두 점을 완성하여 1857년 파리 살롱(Paris Salon)에서 전시했다.[6]
1855년 파리 만국 박람회(Paris International Exposition)에서 평생 업적에 대한 메달을 받은 뤼드는 같은 해 11월 3일 파리에서 사망하여 몽파르나스 묘지(Montparnasse Cemetery)에 안장되었다.[6]
생애 말년에 릴(Lille)의 생테티엔 교회(Church of St. Etienne) 강단 장식 등 종교 조각 작품을 제작했다. 주요 종교 작품으로는 현재 마들렌 교회(Church of the Madeleine)에 있는 "그리스도의 세례"와 소형 흉상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현재 루브르 박물관 소장)가 있다.[6] "세계를 지배하는 사랑" 조각상은 디종 미술관(Dijon Museum of Fine Arts)의 의뢰로 제작되었으나, 뤼드가 완성하지 못하고 폴 카베(Paul Cabet)에 의해 완성되어 1857년 파리 살롱(Paris Salon)에서 전시되었다.[6]
디종 미술관(Musée des Beaux-Arts de Dijon),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루브르 박물관(Louvre)에는 그의 주요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6]
3. 주요 작품
1833년 살롱에서 뤼드의 작품은 1832년 취임한 새로운 내무장관 아돌프 티에르의 눈에 띄었다. 티에르는 미술품 수집가였으며 1828년 살롱에서 뤼드의 작품을 알고 있었다. 개선문의 왕당파 건축가는 교체되었고, 티에르는 뤼드와 정치적 견해가 더 가까운 새로운 건축가 기욤-아벨 블루에를 프로젝트 책임자로 임명하고 뤼드에게 보조를 맡겼다. 뤼드는 1792년 반혁명군과 싸우기 위해 파리에서 출발한 자원병들의 출정을 묘사한 프리즈와 나폴레옹의 이집트와 이탈리아 원정의 개선 귀환을 기념하는 프리즈를 제작하는 위촉을 받았다.[3]
1836년에 완성된 "1792년 자원병들의 출정"(Départ des volontaires de 1792), 혹은 "마르세이유"로도 알려진 작품은 뤼드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은 1792년 발미 전투에서 왕당파 연합군과 싸우기 위해 출정하는 프랑스 혁명군을 묘사하고 있다. 뤼드의 아내 소피 프레미에는 주요 인물인 "전쟁의 천재"(Génie de la Guerre)의 모델이 되었는데, 칼을 든 여인이 다른 사람들을 전투로 몰아넣기 위해 외치는 모습이다. 이 인물의 자세는 1831년 살롱에서 프랑스 정부가 구입하여 1833년까지 룩셈부르크 박물관에 잠시 전시되었던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중심 인물과 비슷하다.[3] 격렬하게 외치는 표정은 뤼드가 1812년 아카데미 학생 시절 최고의 표정 표현 경연에서 우승했을 때 사용했던 표정이다.[3] 군인들은 고대 갈리아 전사들의 복장을 하고 있다.[7] "1792년 자원병들의 출정"은 생동감과 에너지, 그리고 프랑스 혁명 정신에 대한 찬사로 즉시 유명해졌다. 오귀스트 로댕은 1879년 그의 작품 "라 데팡스"에서 비슷한 외침을 지르는 인물을 사용하여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8]
프랑수아 뤼드는 1846년에 클로드 누아로(Claude Noirot)의 의뢰를 받아 나폴레옹을 기념하는 조각상인 《불멸의 각성을 하는 나폴레옹》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픽생에 위치한 누아로 공원(Parc Noirot)에 설치되었다.
뤼드는 파리 개선문의 프리즈 (자원병의 출발)에 대한 비평가와 대중의 찬사에 힘입어 더 많은 의뢰를 받았다.[9] 1832년 루이 필리프는 뤼드에게 카토의 조각상 제작을 의뢰했다.[9] 1837년, 루이 필리프는 베르사유 궁전에 프랑스 역사의 영웅들을 기리기 위한 박물관을 열었고, 뤼드는 1836년에 모리스 드 삭스의 조각상을 제작했다.[9] 1843년에는 뤼네 공작을 위해 10대 루이 13세의 은 조각상을 제작했고, 이는 청동으로 다시 주조되었다. 1845년, 뤼드는 잔 다르크 조각상을 완성했다.[9]
프랑스 제2공화국은 뤼드에게 미셸 네의 조각상 제작을 의뢰했다. 이 조각상은 학문적 전통을 깨뜨린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파리 천문대 앞 광장에 있다.[9]
뤼드는 엘레오노르 루이 고드프루아 카브냐크의 묘비를 디자인했는데, 이는 중세 시대 묘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10]
3. 1. 1792년 의용병들의 출정 (La Marseillaise) (1833-1836)
1833년 살롱에서 뤼드의 작품은 1832년 취임한 새로운 내무장관 아돌프 티에르의 눈에 띄었다. 티에르는 미술품 수집가였으며 1828년 살롱에서 뤼드의 작품을 알고 있었다. 개선문의 왕당파 건축가는 교체되었고, 티에르는 뤼드와 정치적 견해가 더 가까운 새로운 건축가 기욤-아벨 블루에를 프로젝트 책임자로 임명하고 뤼드에게 보조를 맡겼다. 뤼드는 1792년 반혁명군과 싸우기 위해 파리에서 출발한 자원병들의 출정을 묘사한 프리즈와 나폴레옹의 이집트와 이탈리아 원정의 개선 귀환을 기념하는 프리즈를 제작하는 위촉을 받았다.[3]1836년에 완성된 "1792년 자원병들의 출정"(Départ des volontaires de 1792), 혹은 "마르세이유"로도 알려진 작품은 뤼드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은 1792년 발미 전투에서 왕당파 연합군과 싸우기 위해 출정하는 프랑스 혁명군을 묘사하고 있다. 뤼드의 아내 소피 프레미에는 주요 인물인 "전쟁의 천재"(Génie de la Guerre)의 모델이 되었는데, 칼을 든 여인이 다른 사람들을 전투로 몰아넣기 위해 외치는 모습이다. 이 인물의 자세는 1831년 살롱에서 프랑스 정부가 구입하여 1833년까지 룩셈부르크 박물관에 잠시 전시되었던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중심 인물과 비슷하다.[3] 격렬하게 외치는 표정은 뤼드가 1812년 아카데미 학생 시절 최고의 표정 표현 경연에서 우승했을 때 사용했던 표정이다.[3] 군인들은 고대 갈리아 전사들의 복장을 하고 있다.[7] "1792년 자원병들의 출정"은 생동감과 에너지, 그리고 프랑스 혁명 정신에 대한 찬사로 즉시 유명해졌다. 오귀스트 로댕은 1879년 그의 작품 "라 데팡스"에서 비슷한 외침을 지르는 인물을 사용하여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8]
3. 2. 불멸의 각성을 하는 나폴레옹 (1846)
프랑수아 뤼드는 1846년에 클로드 누아로(Claude Noirot)의 의뢰를 받아 나폴레옹을 기념하는 조각상인 《불멸의 각성을 하는 나폴레옹》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픽생에 위치한 누아로 공원(Parc Noirot)에 설치되었다.3. 3. 기타 작품
뤼드는 파리 개선문의 프리즈 (자원병의 출발)에 대한 비평가와 대중의 찬사에 힘입어 더 많은 의뢰를 받았다.[9] 1832년 루이 필리프는 뤼드에게 카토의 조각상 제작을 의뢰했다.[9] 1837년, 루이 필리프는 베르사유 궁전에 프랑스 역사의 영웅들을 기리기 위한 박물관을 열었고, 뤼드는 1836년에 모리스 드 삭스의 조각상을 제작했다.[9] 1843년에는 뤼네 공작을 위해 10대 루이 13세의 은 조각상을 제작했고, 이는 청동으로 다시 주조되었다. 1845년, 뤼드는 잔 다르크 조각상을 완성했다.[9]프랑스 제2공화국은 뤼드에게 미셸 네의 조각상 제작을 의뢰했다. 이 조각상은 학문적 전통을 깨뜨린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파리 천문대 앞 광장에 있다.[9]
뤼드는 엘레오노르 루이 고드프루아 카브냐크의 묘비를 디자인했는데, 이는 중세 시대 묘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10]
1846년에는 『불멸의 각성을 하는 나폴레옹』을 제작했다.[11]
4. 뤼드 미술관
1947년 디종에 개관한 뤼드 미술관은 1887년부터 1910년 사이에 디종 시가 소장하게 된 프랑수아 뤼드 작품의 석고 주형을 전시하고 있다. 이 미술관은 르 뷔이용(rue Vaillant)에 있는 11세기 생테티엔 교회의 횡단부에 위치해 있다.[12]
5. 평가 및 영향
샤를 오귀스트 르부르는 파리의 왈라스 분수로 유명해졌으며, 장바티스트 카르포는 나폴리 어부 소년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제작하여 이름을 알렸다.
참조
[1]
서적
Petit Robert Dictionnaire Universel des Noms Propres
[2]
간행물
François et Sophe Rude
Dossier de l'Art Hors Série
[3]
간행물
François et Sophe Rude
Dossier de l'Art Hors Série
[4]
서적
Francois et Sophie Rude
[5]
서적
François Rude, sculpteur: ses oeuvres et son temps
[6]
간행물
François et Sophe Rude
Dossier de l'Art Hors Série
[7]
간행물
Rude à L'Arc de Triomphe
Dossier de l'Art Hors Série
[8]
간행물
Rude à L'Arc de Triomphe
Dossier de l'Art Hors Série
[9]
간행물
Rude et la célébration des Gloires Nationales
Dossier de l'Art Hors Série
[10]
간행물
Rude et la célébration des Gloires Nationales
Dossier de l'Art Hors Série
[11]
간행물
Rude et la célébration des Gloires Nationales
Dossier de l'Art Hors Série
[12]
웹사이트
Musée Rude : Expositions & Arts Dijon
https://web.archive.[...]
2007-05-31
[13]
뉴스
Joseph-Noël Sylvestre Peintre pompier biterrois (1847-1926)
http://www.latribune[...]
La Tribune de l'Art
2005-11-19
[14]
간행물
Sophie et François Rude, deux œuvres à l'unisson
Dossier de l'art Hors-série
[15]
문서
Fille de son protecteur Louis Frémiet, bonapartiste français exilé volontaire, et tante du sculpteur Emmanuel Frémi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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